한국 소설의 첫 문장 혹은 첫 문단 모음
창 너머로 화단을 보고 있었다.
체리 묘목 두 그루와 해당화 묘목 한 그루가 심어져 있을 뿐인 엉성한 화단이다. 화단 앞으로는 어서 옮겨 심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튤립, 제라늄, 데이지 화분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창을 통해 주방으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의 기운에 이제 정말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나는 침착하고 온화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빛이 사방에서 들어오는 신도시의 단아한 목조 주택에는 따뜻한 주인이 필요한 법이니까.
하지만 평성심을 한순간에 깨어버리는 울음소리가 침실에서 들려왔다.
◀ 마당이 있는 집, 김진영, 엘렉시르
일곱 살 때 나는 '작은' 회사원 같았다. 하루하루가 길고 피로했다. 맡은 임무가 있었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조용히 않아 책 읽기, 글씨 베껴 쓰기, 텔레비전 보기, 심부름하기, 말하지 않기, 뛰지 않기, 울지 않기, 쓸데없이 밖에 나가지 않기, 손님이 오면 인사하기, 손님 앞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동시 암송하기, 한숨 쉬지 않기, 인사하기 인사하기 인사하기, 겸양 떨기.
◁ 여름과 루비, 박연준, 은행나무
시 외곽으로 나가는 다리는 적군이 쏜 미사일에 부서졌다. 한 남자는 무너지는 집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설명하다가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바리케이드 너머, 먼 지방에서 온 할머니는 이제 걷는 건 지겹다며 짜증을 냈고, 따라온 개도 뒷발을 절룩거리며 낑낑댔다.
◀ 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레제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만우절은 아니었다. 만우절이라고 한들 그런 장난이나 유머가 오가는 집안도 아니었다. 유머라니. 유머는 우리 집안에서 일종의 금기였다. 그렇다고 유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창비
어느 날 아침 문득, 정말이지 맹세코 아무런 계시나 암시도 없었는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나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 꼭 그래야만 해!"
한 번만 더 맹세코, 라는 말을 사용해도 좋다면 평소의 나는 이런 식의 격렬한 자기반성의 말투를 쓰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 모순, 양귀자, 쓰다
1930년 11월 어느 늦은 밤 조선총독부.
경복궁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거대하고 흉물스러운 건축물 후원에 세 사람이 무릎을 꿇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깨끗하게 의복을 다려 입고 꼿꼿이 허리를 세운 50대 사내 옆으로 한 명의 젊은이가 붙어 있었꼬 양복을 입은 또 다른 이가 약간 떨어져 있었다.
◁ 풍수전쟁, 김진명, 이타북스
"지지직... 지지직..."
"이게 또 말썽이네."
세린은 요즘 같은 시대에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오래된 라디오를 매만지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탁 소리가 나도록 한 차례 내려치고야 말았다.
-프롤로그
레인보우 타운의 어느 오래된 폐가.
언젠가부터 이곳에 관해 전해져 오는 괴이한 소문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사연을 이 낡고 허름한 폐가에 편지로 보내면, 어느 날 정체 모를 티켓 한 장이 집으로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괴소문
◀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 유영광, 클레이하우스
출발지에 집 주소, 목적지에는 출근지의 주소를 검색해 넣었다. 그리고 자동차 길 찾기 버튼을 터치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나가 우회전 두 번, 바로 좌회전 한번. 자동차전용도로를 타고 직진. 계속 직진. 사거리에서 크게 좌회전. 그리고 직진 또 계속 직진. 그렇게 얼마간 가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큰길까지 나가는 작은 길들을 제외하면 둥근 'ㄱ'자 모양의 길이었다.
◁ 연수, 장류진, 창비
야자수. 나는 야자수를 떠올리고 있다. 물론 내가 떠올리고 있는 것은 하와이아나 발리에 놀러 가면 볼 수 있는 야자수가 아니다.
-프롤로그
사람들에게 잘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우리 가족은 내가 열세 살이 된 겨울부터 열다섯 살이 된 겨울까지 독일에서 살았다. 우리 가족이라고 해봤자 엄마와 나, 그리고 동생 해나뿐이었지만. 우리가 살았던 G시는 독일 중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다.
-1
◀ 눈부신 안부, 백수린, 문학동네
내 목에는 17년째 가시가 걸려 있다. 모두가 그럴 리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느껴진다. 하얗고 긴 가시. 그것은 기도로 넘어가기 직전의 통로에 단단히 박혀 있다.
칵테일, 좀비, 러브, 조예은, 안전가옥
[깨알 상식 TIP]
※ '외'와 '등' 표기 방법
총 10명일 경우
앨리스 외 9명 = 앨리스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9명
앨리스 등 10명 = 10명 중에 앨리스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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