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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수집가/소설문장모음

캐서린 맨스필드 단편선 첫문장 모음 - 차 한 잔 외

by 가을빛혜미 2023. 9. 15.

 

 

 

 

 아이가 검고 높다란 나무들이 양옆으로 늘어선 하얀 오솔길을,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고 누구의 발길도 닿은 적이 없는 텅 빈 오솔길을 막 걷기 시작했을 때, 손이 아이의 어깨를 움켜쥐고 흔들더니 귀 싸대기를 후려쳤다.

 "아, 아, 날 붙잡지 마요." 피곤한 아이가 한탄했다. "가게 내버려 둬요."

 "당장 일어나, 게으른 것아." 목소리가 말했다. "냉큼 일어나서 오븐에 불을 피워. 안 그럼 흠씬 두들겨 패줄 테니." 

 피곤한 아이가 어마어마한 노력 끝에 눈을 뜨자 부인이 아기를 겨드랑이 아래에 끼고 옆에 서 있었다. 피곤한 아이와 한 침대를 쓰는 다른 아이 세 명은 고함 소리에 익숙한지라 계속 잠만 쿨쿨 잤다. 방구석에서 남자가 멜빵을 조였다.

 "밤새 감자 자루처럼 퍼질러 누워서 잠이나 자고 있었던 거야? 아기가 두 번이나 오줌을 쌌잖아."

 피곤한 아이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차갑고 떨리는 손으로 페티코트의 끈을 묶고 체크무늬 원피스의 단추를 채웠다.

 

-피곤한 아이, 캐서린 맨스필드

 

 

 


 

 

 

 바람이 휘몰아치는 언덕을 올드 언더우드는 폭풍처럼 내려갔다. 한 손에는 검은색 우산을, 다른 손에는 꽉꽉 동여맨 빨간색과 하얀색 점무늬 손수건을 들고 있었다. 그는 키잡이처럼 검은색 챙모자를 썼다. 귀에서 금귀고리들이 반짝였고, 작은 두 눈이 불꽃처럼 번졌다. 잿빛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에서 두 눈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언덕의 한쪽 능선에는 소나무 숲이 바다까지 늘어서 있었고, 반대쪽의 울룩불룩한 풀밭에는 하얀 마누카 관목이 곳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소나무 우듬지가 파도처럼 솨솨 철썩였고, 밑동은 배의 용골처럼 삐걱거렸다. 하얀 마누카 꽃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악! 올드 언더우드는 소리치며, 자신의 몸을 떠밀고 때리고 검은색 코트로 휘감아 조르는 바람을 향해 우산을 흔들었다.

 

-올드 언더우드, 캐서린 맨스필드

 

 

 


 

 

 

 아, 이런. 밤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낮에 여행하는 편이 훨씬,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교사 소개소의 담당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저녁 배를 타고 건너가서 기차의 '여성 전용' 객실에서 자면 외국 호텔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안전해요. 객실 밖으로는 나가지 마요. 복도에서 어슬렁거리지 말고, 화장실에 가면 반드시 문을 잠가요. 기차는 아침 8시에 뮌헨에 도착할 거예요. 그룬발트 호텔은 기차역에서 일 분 거리라고 아르놀트 부인이 말했어요. 짐꾼이 아가씨를 안내해 줄 수 있을 거예요. 부인은 그날 저녁 6시에 도착한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 편히 쉬면서 여독을 풀고 독일어 연습도 해요. 배가 고프면 가장 가까운 빵집에서 빵이랑 커피를 사 먹고요. 외국에 처음 나가요?" "네." "난 아가씨들에게 늘 말해요. 처음 보는 살마을 쉽게 믿지 말고 경계하라고. 또, 사람들이 음험한 의도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고, 각박하게 들리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여자로 살아가야 하잖아요."

 

-어린 가정교사, 캐서린 맨스필드

 

 

 


 

 

 

 버지나아는 난롯불 앞에 앉아 있다. 겉옷은 의자에 널어놓았다. 벽난로 펜더 앞에 놓고 말리고 있는 부츠에서 희미하게 김이 올라온다.

 

 버지니아(편지를 내려놓으며) : 이 편지 정말 마음에 안 들어-정말 별로야. 일부러 모욕을 주려고 쓴 걸까, 아니면 원래 편지를 이따위로 쓰나. (편지를 읽는다.) "양말 고마워요. 최근에 제가 양말을 다섯 켤레나 선물 받는 바람에 당신이 준 양말은 친구에게 주었는데, 물론 당신도 기뻐하리라고 믿어요." 아니, 내가 오해하는 게 아니야. 나를 모욕하려고 이렇게 쓴 거야. 끔찍하게 모욕적이야.

 

-늦은 밤에, 캐서린 맨스필드

 

 

 


 

 

 

 이 작은 카페에 내가 왜 끌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카페는 지저분하고 우울합니다. 매일 우울합니다. 거리에 널린 수많은 다른 카페들로부터 구별되는 개성도 없습니다. 단 하나도 없어요. 그렇다고 구석에서 지켜보다가 알아보고, 충분히는 아니지만 대충 (아니지만에 강세) 이해할 수 있는 별종들이 날마다 들락거리지도 않습니다.

 괄호 속에 문장을 보고 내가 인간의 불가해한 영혼 앞에 겸허함을 고백했다고 착각하지는 마세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난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어요. 난 사람들이 여행가방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내용물로 채워진 뒤에 출발해서 던져지고 떠밀리고 떨어지고 분실되었다가 발견되고, 갑자기 반쯤 비워지거나 터질 듯이 꽉꽉 채워지고, 그러다 마침내 궁극의 짐꾼이 궁극의 열차에 던져 넣으면 덜컹덜컹 실려 가는....

 

-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 캐서린 맨스필드

 

 

 


 

 

 

 오후에 의자들이 잔뜩 배달되었다. 거꾸로 다리를 치켜든 작은 금색 의자들이 수레에 가득 실려 있었다. 뒤이어 꽃이 배달되었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면 사람들이 줄줄이 나르고 있는 화분들이 우스꽝스럽게 고개를 까닥거리는 아주 예쁜 모자 같았다.

 달은 화분이 모자라고 생각했다. 달이 말했다. "봐, 저 남자는 머리에 야자수를 쓰고 있어." 하지만 애초에 달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줄 몰랐다.

 

-해와 달, 캐서린 맨스필드

 

 

 


 

 

 

   서른 살이 되었지만 지금도 버사 영은 걷기보다는 뛰고, 인도 안팎을 춤추듯 오르내리고, 굴렁쇠를 굴리고, 무언가를 높이 던졌다가 받고, 가만히 서서 아무 이유 없이-정말 아무 이유 없이-웃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서른 살이나 먹은 사람이 자기 동네 길모퉁이를 꺾다가 갑작스레 환희에-완전한 환희에!-사로잡히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늦은 오후의 태양 한 조각을 꿀꺽 삼켰는데 그것이 가슴속에서 타오르며 반짝이는 불꽃을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구석구석 쏘아 보낸다면?

 

-환희, 캐서린 맨스필드

 

 

 


 

 

 

 홀 입구에서 그는 새끼손가락에 낀 무거운 인장 반지를 돌리고, 돌리고, 또 돌리며 유리벽으로 둘러 막힌 베란다 곳곳에 놓인 테이블과 둥그런 쿠션 의자들을 냉정하게, 유심히 둘러보았다. 그가 입술을 오므렸다. 휘파람을 불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휘파람을 불지 않았고-그저 반지만, 갓 씻은 분홍색 손가락에 낀 반지만 돌리고, 또 돌렸다.

 베란다 구석 테이블에서 두 올림머리가 이 시간대에 늘 마시는 엑기스를 유리잔으로 마시며-잿빛이 감도는 희멀건 액체에 씨앗 꼬투리가 둥둥 떠 있었다-종이 포장재가 가득한 비스킷 통을 뒤적거리다가, 얼룩덜룩한 비스킷을 부서뜨려 엑기스에 떨어뜨리고는 숟가락으로 떠먹고 있었다. 쟁반 옆에는 그들의 뜨갯거리가 두 마리의 뱀처럼 똬리를 틀고 수면하고 있었다.

 

-영원한 사랑, 캐서린 맨스필드

 

  

 


 

 

 

 부두에 모여 있는 살마들이 보기에는 배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거대한 배가 잘게 주름진 회색 바다에 미동 없이 떠 있었다. 배 위로 구불구불한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거대한 갈매기떼가 요란하게 우짖으며 기선 뒤쪽 조리실에서 떨어지는 것들을 따라 바다로 다이빙했다. 몇몇 사람들이 둘씩 짝을 지어 걸어 다니는 것이 아주 조그맣게 보였는데, 마치 구겨진 회색 테이블보에 올려진 접시를 기어 다니는 파리 같았다.

 

-낯선 사람, 캐서린 맨스필드

 

 

 


 

 

 

 날이 눈부시게 청명했지만-파란 하늘에는 금가루가 뿌려진 것 같았고 공원은 큼직한 백포도주 방울이 곳곳에 맺힌 것처럼 반짝였다-미스 브릴은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대기에는 바람 한 줄기 일지 않았지만 입을 열면 얼음물을 마시기 직전의 서늘함이 와닿았고, 이따금 낙엽 한 장이 홀연히,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날아왔다. 미스 브릴은 한 손을 들어 모피를 쓰다듬었다. 사랑스러워라! 모피를 다시 만지는 기분이 좋았다.

 

-미스 브릴, 캐서린 맨스필드

 

 

 


 

 

 

 그날 아침에 문학가는 매주 화요일에 아파트를 청소하는 파커 아주머니에게 문을 열어주며 손자는 어떠냐고 물었다. 어둡고 비좁은 복도에서 파커 아주머니는 발깔개에 선 채로 문을 닫는 것을 먼저 돕고, 그다음에 대답했다. "어즈께 묻었습니다, 선생님." 카퍼 아주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이런, 세상에! 정말 안 됐습니다." 문학가는 충격을 받은 어투로 말했다. 아침식사를 하다가 나온 그는 후줄근한 가운 바람으로 한 손에는 구겨진 신문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영 어색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따뜻한 거실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파커 아주머니의 인생, 캐서린 맨스필드

 

 

 


 

 

 

 매우 이른 아침. 동이 트기 전, 크레센트 베이 만 전체가 하얀 해무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만을 에워싼, 수풀이 무성한 드넓은 언덕들도 안개에 묻혔다. 언덕이 어디서 끝나고 방목지와 방갈로들이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 모래투성이 도로와, 그 너머의 방목지와 방갈로도 모습을 감추었다. 마을 너무 불그스름한 풀로 덮인 하얀 모래언덕이 사라졌다. 바다와 바닷가가 구분되지 않는다. 묵직한 이슬 한 방울이 떨어졌다. 풀잎은 파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덤불에 맺힌 커다란 이슬방울들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만에서, 캐서린 맨스필드

 

 

 


 

 

 

 마음씨 좋은 헤이 부인이 버넬가에서 머무르고 타운으로 돌아간 뒤에 소녀들에게 인형의 집을 선물로 보냈다. 어찌나 컸던지 팻이 짐꾼을 도와 같이 마당으로 들어왔고, 사료창고 문 옆의 나무 상자 두 개에 내려놓은 그대로 보관하기로 했다. 여름이었으므로 망가질 염려는 없었다. 실내로 들여야 할 즈음에는 페인트 냄새가 빠질지도. 인형의 집에서 풍기는 페인트 냄새가 너무도 독해서, (물론 이렇게 관대하고 다정한 선문을 보내주신 헤이 부인에겐 감사하지만!) 냄새만 맡아도 병에 걸릴지 모른다고 베럴 이모는 말했다. 인형의 집에서 덮개를 벗기기도 전이었는데 말이다.

 

-인형의 집, 캐서린 맨스필드

 

 

 


 

 

 

 로즈메리 펠은 딱히 아름답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그녀를 미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예쁘장한가? 글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렇지만 사람들은 뜯어보는 것처럼 잔인한 짓을 왜 하겠는가? 로즈메리는 젊고 똑똑하고 매우 현대적이었으며 옷을 대단히 세련되게 입었고, 현대 문학 중에서도 최신작들을 섭력했으며, 그녀가 주최하는 파티에는 중요한 명사들과... 조금 특이한, 그녀가 발굴한 예술가들이 흥미롭게 섞여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저속했지만, 나머지는 보기에 꽤 즐겁고 재밌는 사람들이었다.

 로즈메리는 결혼한 지 이 년 되었다. 귀여운 남자를 데리고 산다. 아니, 티머 말고-마이클. 게다가 남편은 그녀를 무척 아꼈다. 부부는 부유했다. 안락하다고들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나 어울리는 그 불쾌하고 갑갑한 단어로 표현되는 부가 아니라 , 진정한 부자였다.

 

-차 한 잔, 캐서린 맨스필드

 

 

 


 

 

 

 "자네. 여기서 아주 편안하겠구먼." 우디필드 씨가 색색거리며 말하고, 유모차에서 밖을 내다보는 아기처럼 목을 길게 뺐다. 그는 친구이기도 한 회사 사장의 책상 옆에서 커다란 녹색 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화는 끝났다. 이제 나가봐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우디필드 씨는 떠나기 싫었다.

 

-파리, 캐서린 맨스필드

 

 

 


 

 

 

 저녁이다. 식사를 마쳤다. 우리는 작고 추운 다이닝룸에서 난롯불이 있는 거실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다. 나는 구석 책상에 벽을 등지고 앉아서 거실을 보고 있다. 녹색 등갓을 씌운 램프에 불이 커져 있다. 책상에는 참고 자료로 쓰는 커다란 책 두 권이 펼쳐져 있고, 종이가 수북이 쌓여 있다.... 그러니까, 매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구색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결혼한 남자의 이야기(미완), 캐서린 맨스필드

 

 

 

 

 

 

 

 

 

차 한 잔

 

캐서린 맨스필드

구원 엮고 옮김

 

코호북스

2022.4.28